사물의 기호들 : 익숙함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서는 공간에서의 대내외적인 홍보와 교육 등의 방식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유예하거나, 불식시키는 과정이 있다. 이러한 과정은 기획자 혹은 기획단체가 사회적 순기능을 위한 필요과정이라고 생각하거나,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지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수단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마치 이 불만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의존한다. 프로젝트는 공공성을 지향하는 듯 보이다가 결국 사적인 어떤 문제들만이 남기고 사라지는데 사실 이 시기에는 누구도 책임을 가져 가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 주민들에게는 변형된 공간에 익숙해지는 시기가 온다. 그리고 결국, 이 익숙함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유일한 '공공' 재산이 된다. 때로는 삶을 예술로 구성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들은 기다림과 익숙함을 배워야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공공 미술에서의 무난한 성공쯤으로 말 할 수 있다면, 노련한 기획자들은 사물들의 모든 과업에서 이 익숙함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직조하는가에 따른 전략적 접근에 기인한다.
죽은 사물
사물들의옆에 놓인 설명판을 보게되면, 상당히 많은 확률로 기이한 문장들로 쓰여진 것들을 보게 된다. 대부분 사물의 표면적 장식들에 뒤엉킨 내용을 묘사하고 있으며, 각자의 유토피아적 소망으로 마무리 짓는다. 사물들은, 대량으로 양산되고 있는 공공 미술 이미지의 찌꺼기들- 예를 들어, 벽화에 흔히 쓰이는 이미지, 짜 맞춘듯이 몇가지 안에서 정해지는 조형 재료들과, 혹은 오직 장식을 목적으로 하는 기호들- 을 한 곳에 뭉쳐 놓은 방식이다. 그래서인지 그러한 사물들은 오직 빈 곳을 채우기 위한 강박적 행위가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사물들은 기원적 태생의 배경 그 자체가 처음부터 폐기되기만을 기다리는 죽은 사물로써 태어나는것 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사물은, 살아있는 자연의 껍데기와 생명의 작동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포르노그라피
"xx형한테 많이 챙겨 줬어요." - 공공미술 참여 작가.
'사물화'는 어떠한 대상이 사적 욕망을 위해서 하나의 상품이 되는 과정에 가깝다. 주체를 비판할 대타자가 없는 상태에서 작업 생산자의 이러한 발언은, 공공 미술 그 자체가 철저하게 사물화되었음을 날것으로 증명한다. 사물이 생산자의 물신적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생산자가 ‘공공'의 영역을 '사적' 욕망의 영역으로 손쉽게 환원하고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첫 번째, 사물들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재료는 대부분 짜 맞춘 듯이 몇 개의 정도에서 정해지며, 그 크기는 한 면의 길이가 최소 2,000mm가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다. 사물의 크기가 작다면, 그 숫자를 늘려서 공간을 차지하는 형태가 되며, 평면에 가까워진다면 얇고 길어지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제작자의 사적인 이득과 사물의 부피는 반비례할 것이므로 사람이 인지하기에 크다고 느끼는 지점 즉, 보는 사람의 인체보다 좀 더 큰 것이 기준이 된듯하다. 이는 사물 생산자가 받은 자본을 최대한 외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강박적 의무와 생산자의 사적 자본의 욕망이라는 교차로에 출연한 결과이다. 또한 사물의 재료와 크기는 곧 투여된 노동력과 자본을 대표한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질서는 사물의 성격과 상관없이, 생산자가 사물의 크기와 재료를 미리 결정하게 만든다. 따라서 짐작건대, 제작에 투여되는 자본의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크기와 양은 비례해질 것이다. 거기에는 생산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어서 만약 재료적 제약이 없다시피 하여 무한히 커지거나 길어질 수 있다면, 사물은 당연히 공간이 허락하는 한 무한히 증식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사물은 불가침의 신성한 영역으로 남겨진다. 공공의 공간을 점유하는 순간, 경탄을 제외한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때로는 공공의 공간을 점유하면서 가해지는 폭력이 생기더라도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상에서 유일하게 이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는 그 위에 누군가 몰래 쓰레기를 올려놓을 때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침범 행위에서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로 변화시킬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의 본래의 용도를 바꾸는 것. 즉, 신성한 사물의 불가침 영역에 전혀 다른 용도를 덧입힘으로써 본래 사물에 힘을 가하는 것이다. 공공의 영역을 점유하는 순간, 공공 미술작품은 여전히 공공의 영역이 아닌. 오직 사적인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듯 보인다.
#3
사물들은 대부분 장소 특성적인 내용을 강박적으로 적용 당하고 있다. 제작자는 이러한 특성을 재고해 볼 여지가 있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사물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어쩌면, 이러한 특징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은 공공을 사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사물의 장소 특성적 성격이 곧 그 장소에 종속됨을 의미한다면 그 장소에 먼지처럼 퍼져 있는 욕망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사물의 기호들 : 기능
"멀리 떨어져서 삼자의 시민으로 봤을 때는, 작품의 '의미'를 보고 좋았다고 생각했다. 뉴스로도 접하고 내용을 보면서, 상징성에서 그래 '잊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저 그림의 주인공들은 싫어할 것 같다. 본인이 맞닥뜨린 그 모습이. 예전에 고생했던 그 모습을 직면하는 게 싫지 않을까." / "흰여울문화마을도 실제로 사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러나 외부인들이 벽화를 보고 구경하는 건 좋아한다. 관광객으로 가는 것은 좋은데, 실제로 사는 사람들은 불편하고 싫어한다." - 영도 주민 (영도 부동산 중개업)
"이제는 사람들이 벽화를 그린다고 하면, 우리 동네가 싸진다고 생각한다. 환경개선 대상 지구로 지정되는 것처럼... 그래서 새로 아파트를 짓는데 담이 높아서 거기에 벽화를 그린다고 하면, 주민들이 난리가 난다고 한다. 아파트 가격이 내려간다고." / "감천문화마을은 원주민이 아니면 외부인 출입 시간제한이 생겼다고 한다. 또는 원주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창출 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도 있다고 들었다." - 영도 주민
때때로 벽에 그려진 사물과 이외의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들의 태생적 기원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을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공간을 위한 것이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목격한다. 이 사실을 부정할 만한 어떠한 사물, 즉 그 공간의 사람들을 위한 특정한 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물의 태생적 기원은 모두가 공공의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결국, 미적 장식이 유토피아가 되는 사태 속에서 사물의 효용적 기능은 처음부터 부차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특정적 기능을 가진 사물들이 태어나기 위한 프로젝트 및 사물의 생산 배경과 과정, 점유하고 있는 공간 속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를 자세히 보기만 하면 된다. 사물들은 내부의 사람들에게는 작동하지 않으며, 외부에서 삽입된 시선의 결과이다. 따라서 오직 외부로 인해서만이 사물은 작동한다. 이것은 공공미술과 젠트리피케이션이 분리 되어 생각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기록#1
A 작가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높은 금액을 요구했고, 실제로 다른 작가들에 비해 높은 금액을 지원받았다는 인식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가 스스로가 다른 작가들과 비슷한 수준의 사례비만 받겠다고 기획단체 측에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제작비는 모두 인건비와 제작 관련한 비용으로 지출했다고 했다. 제작을 맡은 업체는 B 작가가 운영하는 조형물 제작 업체이다. A 작가는 구청 및 기획단체에서 애당초 원하는 모양과 내용이 있었고, A 작가는 이를 승낙 했다. 그러나, 진행 과정에 있었던 기획단체 대표의 간섭은, 조형물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 11월 2일 A 작가 도우미와의 대화 기록.
기록#2
C 작가는, 스스로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그 프로젝트에서의 '수월함'과 '가성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줌. 조형물 형태를 만드는 다른 지역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D작가의 고생스러움과 비교. C 작가는 공공 미술이라는 유행 속에서 작가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최소화하는 반면 높은 임금을 벌 수 있는 것에 만족한 듯했다. 그 프로젝트는 임대한 전시장을 작가들이 운영하게 하면서 전시를 이어가는 방식이었고, 주민들은 작가들의 인스턴트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었다. - 9월 28일 C 작가와의 대화 기록.
기록#3
직접적으로 질문 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나온 것. 주최 측이 작가에게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주는 것에 대해서, 대체로 작가들은 긍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다. E작가는 기획단체 측에서 제시하는 장소에서 작업하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는 것이 없었다. 동일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다른 작가들 역시 비슷한 태도였다. 또한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의 외부적 간섭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혹은 F 작가는,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공공 미술에서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 11월 5일 E 작가와의 대화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
기획자 및 기획 단체들이 기본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틀을 작가한테 마련해주는 경우, 작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작품 내용 및 방향에 대하여 별다른 문제점을 제기하기보다는 일단, 받은 틀을 수용한 후 그 안에서 생각하고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식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작업 진행에 있어서 작가에게 어느 정도 소극적인 태도를 동반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제공된 가이드라인을 수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작가에게 '공공'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이 요구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공된 가이드라인은 이미 무엇을 해야 할 것을 정해놓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생산 장치에 대한 지배력이 상실된 상태이지만,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내기 때문에 손쉽게 이를 수용한다. 그리고 생산과정에서 가해지는 잦은 외부적 간섭은 생각보다 빠르게 작가의 심리를 안정화한다. 처음에는 불안정한 요소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작가에게 책임 회피와 면책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방어를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나의 잘못을 대신 감당해줄 수 있는 대리자가 출현하는 상황은 의외로 작가를 수동적인 형태로 매몰시킨다. 작가가 머릿속에서 자본과 생산물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물신적 위안을 얻게 되는 것처럼, 이 역시 마찬가지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공공 미술은 프로젝트 형식을 갖게 되면서 작가에게 적지 않은 심리적 방어막이 되어주기도 하는데, 아무도 이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지 않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공공'의 영역을 사적인 영역으로 인식하고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손으로 잡는 순간 빠져나가는
"공공기관에서 시키거나, 주문하거나, 흉내 내거나, 알아차릴 수 없는 것들로 작업을 진행한다. 공공 기관이 알아차릴 수 없는 애매한 부분으로 작업한다."
"매개자는 양쪽의 입장을 다 만족하게 해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양쪽 입장을 다 들어주고 다 만족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일종의 '절충안'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이 이런 절충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쉽게 절충주의를 합리적으로 생각하지만 결국 이것은 이쪽도, 저쪽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모난 부위를 깎아서 평평하게 만드는 게 절충주의라면 기획자든 예술가든 가장 피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예술의 상황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 없어지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지금 전국 공공 미술 정책이나 상황을 보면 이런 평지화 작업 같다. " - P 작가와의 대화
매우 소수의 작가들은 외부에 의해 작가가 매몰되지 않기 위한 전략을 스스로 구성한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프로젝트가 예상하기 힘든 상이한 조건들의 환경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로인해 외부에서 가해지는 간섭들이 작품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요소로 인지한다. 따라서 섭외되는 단계부터 자신이 설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 혹은 자신이 우려하는 결과가 프로젝트에서 예측되는 경우는 제의를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경우 또한 자신의 행위 기원을 변형하지 않으며, 외부적인 간섭의 경우가 생긴다면 프로젝트를 중단하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손으로 잡는 순간 스르르 빠져나가는 작업'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기묘한 표현은 지금껏 보아왔던 다른 사물과의 차이점이 드러낸다. 작업은 물질적으로 공간을 점유하지 않거나, 점유하고 있다가도 불특정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자연적인 요인으로 인해 사라진다. 따라서 작가는 작품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위를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인해 정형적이고 확고한 형태의 사물들을 요구하는 공공기관 또는 공공 미술, 그리고 먼지 처럼 도사리고 있는 사적 욕망 시스템의 갈고리 사이를 빠져나간다.
사물의 기호들 : 재기발랄함
사물 생산자에게 찌꺼기는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찌꺼기는 생산자들이 사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용하다고 인식한 이미지와 정보들을 머릿속에 축적한 것이다. 찌꺼기가 쓰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검열과 앎의 과정을 요구하며, 그것들을 폐기해야 할 때도 있다. 때때로 생산자들은 그러한 과정 없이 손에 익은 찌꺼기들을 모아 공간을 도화지 삼아 마구잡이 식으로 콜라주 한다. 만드는 정성스러움과 수고로움, 미적 형상이 미덕이 되며, 형상만을 뇌리에 각인시키려는 자각방식을 우선으로 재기발랄함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반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생성해내는 것은 아니고, 단지 파편적으로 머릿속에 존재하는 찌꺼기들을 의미 없이 사물에 붙이는 방식을 반복한다. 그래서 어떠한 것을 '생성' 하는 것이 아니라, 유아적으로 '메우는' 행위가 목적이 된다. 그 결과 사물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유령 같은 상태를 맞이한다. 또한, 사물의 옆에 항상 존재하면서 사물의 언어를 대신하고 있는 설명 판을 보면 사물과 언어, 내용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되는데, 이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설명 판에서 보이는 ' 이 사물의 ~은 ~을 의미한다. ', ' ~을 나타낸다.' 는 식의 문장, 또는 마법의 주문 같은 기이한 문장은 앞서말한 사물이 유령화 되었음을 드러내는 결과이다. 생산자들은 공공미술이라는 기계속에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잘못된 방식으로 결정하고 이미지화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오른손이 얻을것을 왼손이 뺏아가도 어짜피 한몸뚱아리 인 것을.
사물들이 공간을 점유하려고 하는 순간, 모든 '공공'의 것들이 사적인 영역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미 다양하고 예측하기 힘든 사적인 욕망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공간을 사물로 채운다는 사실은 결국, 모든 사적 욕망을 채워야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다만, 1%의 사물 생산자는 애초부터 자본가의 사적 공간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자유롭다. 사물이 어떻든 그들은 자본가와의 계약에 충실한 봉사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반면, 이 외의 사물 생산자들은 사물이 점유되는 공간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그 운명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 공간적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야 하며, 사적으로 귀결되는 상인들과 주민들의 욕망을 무시할 수 없으며, 미적인 아름다움과 작가로서의 열망을 쏟아야 하며, 자신의 사적 욕망과의 적당한 타협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주최 측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도 작가로서 긍지를 잃지 않아야 한다. 생산자는 이 모든 게 조화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적 욕망이 들끓는 공간에서, 이러한 조화로움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국, 모든 것을 수용하는 방법이라고는, 겨우 무난한 변화 정도라고 귀결된다.
#4
어떠한 프로젝트 경우, 상인들의 반발로 인해 프로젝트의 일부가 수용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는 상인들의 지극히 사적 욕망이 작동되어 발생한 경우이다. 상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한 공공주차장이었지만, 사물이 그 공간을 대신하게 되면서 생긴 반발이다. 결국, 사물은 주차장을 대신하게 되면서 거센 반발만 남았다. 반면, 주변의 신축 아파트 주민들은 상인들과의 대조적으로 긍정적인데 이 역시 지극히 사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또한, 시장 입구 쪽에서의 설치 중이거나, 설치되었던 사물들 일부는 철수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상인들의 이유는 불분명 하다. 단지, 반대쪽 상인들의 반발이 컸다는 점에서, 한쪽 시장의 입구가 랜드마크화된다면, 반대쪽 상인들의 경제적 이득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이유가 가장 가까운 추측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정치적으로 구성하여 현재의 정치 세력에 피해를 주고 다음 세력으로 입지를 구성하려는 정치 세력과 이를 돕는 언론이 더해진다. 이러한 개떼 같은 욕망의 삶 속에서 '공공'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희극적 변형을 겪게 된다.
#5
공공기관의 경우, 또는 그 공공기관을 대표하는 누군가는 그 공간을 오직 경제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실재와 현실을 혼동하는 위치에서 그러한데, 결국은 실재로 오인된 현실적 경제적 지표와 이를 위한 미적 완화의 결과만 가지고 성과 보고 하는 게 공공기관의 속성이다. 그리고 분석과 성과는 곧 지극히 사적인 방식으로 적용된다. 만약, 성과 보고의 양식에 기록되기 힘든 형태 즉, 기록의 시스템에 적용하기 힘들거나 공공기관 체제가 수용하기 힘든 반동적 성격의 작업이라면, 공공기관 담당자 또는 대표하는 누군가는 매우 난처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