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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프로젝트 영도


이 프로젝트는 한 문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겠다"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것들, 예를 들어서 벽화나 조형물 같은 공공미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전형의 결과들, 공공의 장소를 반영구적으로 점유하는 어떤 것들을 만들고 남기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통해 2021 프로젝트 영도는 7명의 작가(권은비, 박금비, 박자현, 송기철, 정현준, 진세영, 허찬미)와 5명의 운영단(김상아, 김효영, 안소현, 이다솔, 서평주)으로 구성되어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로 아트북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 현수막 프로젝트, 작가들의 개별작업, 가상의 주제로 진행한 토론영상, 2022년 2월에 진행된 공론장 등을 지금 보시는 홈페이지에서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로젝트 초기, 우리의 공통된 의문은 도대체 '공공'이라고 불리는 것은 무엇일까였습니다. 때문에 공공미술이라고 여태 불리어 왔던 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사례들을 찾아보고 논의하면서 공공이 무엇인지 공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수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은 강사들을 초청해서 듣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예술가들만이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들을 수 있는 강의를 통해서 시민들이 생각하시는 공공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맥락 아래에 영도라는 도시, 영도라는 섬, 영도라는 장소에서 진행되어야 할, 수행되어야 할 공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영도의 구조를 들여다보고자 했고, 각각의 공공을 찾는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우리들은 영도의 롤러코스터 같은 경사와 그 경사를 따라붙어있는 삶에 대해, 한진중공업의 크레인과 봉래산 정상을 가리는 브랜드 아파트에 대해, 영도의 초고령화 문제와 지역 소멸에 대해 말했습니다. 또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식생과 일상의 삶에 대해, 그 삶들은 지워지고 섬 전체가 마치 놀이공원 같은, 급격한 관광지화 되어가는 부분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크게 <영도의 축>으로 명명하고 노동의 축, 자본의 축, 동식물들의 축 등으로 나누어 저희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영도의 기본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남아있던 장면이 있습니다. 마을 투어 중에 공장이 밀집한 골목 어딘가에서 우리가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반대에서 그 노동자가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불과 몇 미터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넘을 수 없는 투명한 벽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당장은 정의 내리기 힘들었던,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그 시선에 대해서 논의했고, 나아가 영도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높이를 점유하고 바다를 오션뷰로 내려보는 시선, 공장을 통째로 카페로 만들고자 하는 자본가의 시선, 흰여울마을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의 시선, 백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영도 관련 유튜브 콘텐츠에 드러난 시선, 또 이 모든 것들을 무심히, 혹은 따갑게 바라보는 주민의 시선 등입니다.

우리는 다시 공공미술로 돌아와서 우리가 공공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태의 그것은, 우리가 수없이 만들어낸 벽화와 조형물들, 그것들을 포함한 결과물들은, 정말 공공을 위한 것이었나.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시선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어떤 욕망의 시선을 공공예술이 대신 대변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한 욕망 속에는 결국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재개발, 그 개발/재개발을 둘러싼 욕망처럼 자본의 논리가 매 순간 작용하고 있고, 공공미술은 그것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소멸해가는 도시, 혹은 쇠퇴해가는 도시의 문제를 작게는 벽화마을, 벽화골목 크게는 문화도시,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바라보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입니다.

이 홈페이지는 우리의 이런 과정과 고민들을 담은 아카이브이자 또 하나의 작업으로서의 결과물입니다. 참여 작가들이 프로젝트 기간 중에 공공미술에 대한 저마다의 입장을 고민하며 써 내려간 선언문들, 공론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제작한 가상 토론 영상 등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2021년 프로젝트 영도의 작업들은 이제는 결과물이 되어 남을 뿐이지만, '프로젝트 영도’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공동 프로젝트 - 공공미술 선언문


2021 ‘프로젝트 영도’ 팀은 공공미술에 브레이크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이미 공공미술이 차고 넘치는 영도에 무작정 더하기보다, 일단 멈춰서 분분한 공공미술에 대해 토론의 장을 여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가속이 붙은 제도 안에서는 멈추기 위해서도 외침이 필요했습니다.

참여자들이 길게 토론하고 함께 쓴 이 선언문들은 공공미술에 붙은 관성적인 말들을 떼내고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들을 뒤집어보기 위한 외침입니다. 하지만 이 선언문에 확신에 찬 정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혼란 가득한 글을 선언문이라 부르는 이유는 공공성에 대한 토론은 혼란할 수 밖에 없고 혼란스러워야 함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은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2022, 영도문화도시센터) 책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공동 프로젝트 - 현수막 프로젝트


더하기를 멈추고 질문을 반복하자, 평화롭기만하던 공공미술 아래에 우글거리는 것들이 엿보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덮어두기보다 노출하는 것이 오히려 공공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현수막이라는 매체를 선택했습니다. 사실 “지워도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은 벽화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워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 모두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결코 지울 수 없는 싸움이 있던 공장과 크레인, 어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바다, 삶을 뒤엎는 준거가 된 소셜 미디어의 ‘좋아요'에 이르기 까지, 현수막들은 영도에 고르게 걸렸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벽화 곁의 현수막만 큰 마찰음을 냈는지 여전히 의문이며, 우리는 거기서부터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북토크


단행본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 출간을 맞아 그간의 고민을 나누기 위해 북토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예술가 선언문에는 혼란스러운 공공미술 세계를 단숨에 정리할 논리나 해법은 없습니다. 허나 우리가 왜 고민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지, 왜 논쟁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예술가들의 자전적 선언이 담겨있습니다.

선언문을 완성한 작가들이 그 과정과 소회를 공유하고, 시대적, 장르적 맥락 속에서 선언문의 이해를 높여 줄 전문가 발제 및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2021년도 프로젝트 결과를 첫 공개하였습니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공공미술에 대한 단상과 연상’, ‘공공미술 선언문’, ‘공공미술 통상 관념사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언문과 사전은 해당 웹에서도 살필 수 있습니다.

발제
_ 이명훈(예술공간 돈키호테 기획연구팀장)
_ 안태호(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공동 프로젝트 - 공공미술 관념 사전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 책에는 선언문 외에도 공공미술 관념 사전이 실렸습니다. 우리가 목격한 공공미술의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풍자가 필요했고 그 방식을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에서 빌려왔습니다.

작가 개인 프로젝트


공동 작업 외에도 각자의 언어로 공공미술을 말하기 시작한 작가들도 있었습니다. 공공미술을 단순히 ‘인지’하는 일조차 쉽지 않음을 데이터 라벨링으로 보여주고(박금비), 공공미술 논의에서 좀처럼 언급되지 않지만 늘 중심에 놓인 부동산 문제를 다루기도 합니다(정현준). 공공예술과 도시 생태계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관계자들과 구술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고(권은비), 공공미술에 대해 주민, 예술가, 기획자들에게 질문을 던진 끝에, 한없이 얽힌 욕망들을 뒤로 한 ‘그냥 삶’을 기록하려 애쓰기도 했습니다(송기철). 이 작업들은 일종의 서론으로, 작가들은 이 낯선 장면에서부터 각자 계속 고민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공공미술 공론장


지난해 봄부터 ‘프로젝트 영도’에 참여한 예술가, 기획자, 운영자들은 공공미술에 관해 질문하고 공부하고 토론해왔습니다. 공공미술은 들여다볼수록 혼란스럽기만 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공공미술의 가장 큰 문제는 거기에 온갖 욕망과 절실함이 뒤엉켜있는데 아무도 그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끈하고 안전한 말들을 공허하게 주고받기보다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입장들을 가감 없이 터놓는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공공미술 예술가 워크숍


올해는 이 단하나의 물음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해보았습니다.

시민, 예술가, 행정가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공공미술 사업을 왜 계속 해야할까요?

시간과 장소, 예산 등 복합적인 제약에 가로막혀 예술가들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을까요?

예술가 우리가 주체적으로 공공미술에 대해 심도있게 학습하고 고민을 시작한 적이 있었는지, 문득 아득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 삼키지도 뱉지도 못할 공공미술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 해보기로 했습니다.

예술가 워크숍은 공공미술에 대한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비판적·대안적 논의의 장이자, 지역리서치 기반의 영도공공미술 회고를 진행하며, 도시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해야할 공공미술의 역할과 의의에 대해 예술가로서 고찰하고 실천담론을 나누었습니다.

- 분야별 전문 강의
공공성, 공공예술, 지역연구, 커뮤니티 아트 등에 관한 이해도 증진 및 사고 확장을 위한 전문가 초청 강의 및 토론(일부 시민 공개)

· 공공에 대한 환상과 공공미술_아렌트와 하버마스의 '공론장' 비판적으로 읽기
이보성(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 ‘공공예술’의 난점
추희정(독립 큐레이터)

· 성남프로젝트, 마석 가구공단 그리고 다시 지역
조지은(작가)

· 비평적 리부트로서의 공공예술
안소현(독립 큐레이터)

· 공공성과 을의 민주주의
진태원(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식물 지역 예술이 교차하는 경험에 대하여
창파(독립 큐레이터)

· 사회정책으로서 예술정책, 공공성을 묻는다
김상철(예술인소셜유니온 운영위원)

· 사회적 개입으로서의 공공미술 (Public art as a social intervention)
권은비(작가)

· 공공예술에 대한 질문들
김월식(작가)


- 영택트
프로젝트 참여 예술가들 대상 지역 이해를 위한 해설 및 탐방 워크숍

- 영도리서치
영도에서 진행된 공공미술 사업의 현황 조사 및 비평을 통해 앞으로 영도에서 진행되어야 할 공공미술의 방향성을 고찰해 보는 집중 토론회

시민살롱


예술가와 시민이 만나 예술에 대한 생각과 감각을 교류하고 상대방의 세계로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영도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현장형 프로그램으로, 예술가에게는 지역에 대한 이해를, 시민들에게는 지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2021 프로젝트 영도 참여자


권은비


사람의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을 눈여겨본다. 기울어진 땅에서 중립으로 서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화두로 자본, 정치, 사회, 국가, 식민 등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으며 대다수의 예술 프로젝트를 지역주민 또는 관객들의 참여와 협업으로 만들어왔다.

김효영


공간 힘을 운영하며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부산에서 동료 기획자를 만나고 연결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박금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기기를 좋아한다. 미술 곁을 알짱거리며 한 발 담그기를 실천 중이다. 파트 타임 잡에 특화되어 있다. 노동 중 발견되는 무언가를 좇는다. 인공지능 도둑 대응법을 개발 중이다.

박자현


예전에는 예술공간과 재개발을 앞둔 마을 주민들 사이에 서 있는 이중 첩자였습니다. 최근 2년은 흔적과 증거를 밝히기 위해 할머니 탐정으로 일했습니다. 동시에 아르바이트와 일용직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서평주


지역 토호세력을 목표로 문어발식 확장을 추구한다.

송기철


2015년도부터 부산에서 설치 작가로 활동해왔다. 전시는 일 년에 두 번 정도로 많이 하지 않지만, 근근이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최근 했던 전시로 인해서 반성 중이며, 최신 유행을 뒤적거리며 과거로 퇴행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안소현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쓴다. 비평의 가능성을 넓히되 사회적 여파가 없는 창작을 피하려 한다. 정치적이 되는 형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다솔


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화·전시 기획에 발을 들여놓았다. 잘할 수 있는 일과 못하는 일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앞으로 100세 시대를 살아가며 몇 가지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기대한다.

정현준


김해 장유 사람이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였다. 2019년 아홉수인 기해(己亥)년에 서울로 상경하였다. 고향이 생각날 때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를 듣는다. 서울에서 말을 배우는 중이다.

진세영


철학을 공부하다가 문화기획을 전공으로 학부를 마쳤다. 문화연구, 전시기획에 관심을 키워가며 실천으로 옮겨보고 있다. 특히 부산의 근대 미술 작가연구와 아카이빙 작업에 관심이 많고, 이를 바탕으로 비평적 태도를 견지한 큐레이터가 되고자 한다.

허찬미


부산에서 나고 자라 옥탑에서 작업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의 속도와 급변하는 건축, 그 앞에 놓인 인간, 동물, 식물 등 작은 개체들에 대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영도문화도시


영도는 2020년도 제1차 법정문화도시로 선정되었습니다. 법정문화도시란 ‘모든 도시는 특별하다’라는 모토 아래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 스스로 도시의 문화 환경을 기획·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라 포괄적으로 예산을 지원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사업입니다.

이에 영도문화도시는 사람, 자연, 역사가 예술로 이어지는 도심의 섬 영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2024년도까지 도시를 아우르는 다양한 사업을 펼쳐갈 것입니다. 본 공공예술 프로젝트는 영도문화도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며, 연차별 단계적 진행을 통해 도시와 시민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안을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공론장 발표자료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현재 진행중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프로젝트는
<공동세계 - 영도로부터의 항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동세계’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욕망으로 서로 관계하며 움직이는 세계를 말합니다. ‘공동세계’는 때문에 불완전하고 불공평하며 불합리합니다.

작년에 저는 부산 영도에서 ‘모두가 원하는 진짜 좋은 공공미술은 무엇인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질문에서 ‘모두’는 ‘누구’이며, ‘진짜’ 좋은 것은 ‘무엇’이며, ‘공공미술’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들이 공공영역에서 ‘모두’를 이야기할때 배제되는 사람들은 없을까요? 지금 여기에서 공공미술로 통해 수면 위로 보여줘하는 공공성은 무엇일까요?

‘모두가 원하는 진짜 좋은 공공미술에 대한 질문을 받은 이후, 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영도의 섬 주변에서 출렁이는 바닷가에 두둥실 떠다니는 한 부유물처럼 어느 하나의 답에 정박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영도로부터 출발한 질문들에 탑승하여 공공미술을 찾아헤메는 항해를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공공미술은 흔히 ‘성공사례’로 화자가 되곤 합니다. ‘성공’이라는 평가기준앞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도시속에서 행해지는 어떠한 공공미술이 성공한 후에 그 도시에는 어떠한 변화가 생겼을까요? 그 성공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요?
공공미술이 이루고 있는 공동의 세계속에서 저는 세 개의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경기 성남시 태평동, 부산 영도구 흰여울마을,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 이 세 도시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저마다 ‘지형의 기울기’ 갖고 있는다는 것입니다. 이 도시들에 집과 집사이에는 높낮이가 가파릅니다. 누군가는 낙후된 동네라고 말하고 누구는 문화예술 수혜를 받지 못하는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삶을 살아가기에도 벅찬 기울기속에 있는 지역주민들은 이런 구호를 붙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화예술이고 뭐고간에, 무엇보다 삶을! 그래서 저는 이런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지금, 공공미술이 호명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세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에게 각자의 공공미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 속에서 누가 호명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저마다 공공미술에서 호명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가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이 공공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호명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주민 거주자 건축가 건축주 공무원 관객 군인 기획자 노동자 대통령 동네주민 동네주민 리차드세라 마을 활동가 마을주민 마크 퀸 문화기획자 문화인 미술가 반공무원 부부 비전문가 사람 상인 서울시장 시민 시장 어르신 어린이 예술가 오윤 원주민 유가족 유명예술가 유지 일용직 임대인 임차인 전문가 주체 지역주민 작가 철거민 청년 투기세력 팀원 파견예술인 피해자 학생 할머니 행정가 활동가

제가 만난 사람들이 공공미술에 대한 이야기속에는 대통령도 등장하고, 투기세력도 등장하고, 일용직도 등장했고, 피해자도 등장했습니다.
아까 제가 ‘영도로부터의 항해’를 시작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이 저의 항해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이러합니다.

3명의 인터뷰어(Interviewee)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각각 만나는 인물마다 3명의 관계자들을 소개받고 또 다시 인터뷰를 하면서 인물들을 통해 공공예술과 도시생태계에 대한 지도를 만들어간다. (참조: 6인의 법칙 또는 좁은세상네트워크 이론, Milgram, 1967)

세 도시에서 각각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로부터 다시 세명의 공공미술 관계자들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경기 성남시 태평동에서 만난 만난 공공미술관계자의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성남에서 공공미술을 이야기하니 광주대단지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1971년 정부의 졸속적인 도시계획과 행정에 시민들이 도시를 점거하고 집단 항거를 했던 사건이죠.
성남에서 만난 사람에게 “도시에서 머릿속으로 딱, 떠오르는 공공미술 작품은 어떤 게 있을까요?” 라고 묻자, 돌아오는 답은 이러했습니다.
“……. 전 없습니다.”
또 그들은 공공미술에 관계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작가들이 시민들에게 하는 봉사가 행정가 또는 이른바 결정권이 있는 사람들에게 공이 되는 것, 그로 인해 작가가 대상화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부산 영도에서 만난 공공미술 관계자에게는 이런 질문을 했는데
“공공미술사업 진행하시고 나서 좀 어려웠던 점이나 뭐 그런 것들이 있으셨어요?”
그의 답은,
“행정기관에 있다 보니깐 사실상 그 설득의 과정, 그 뭐라고 항상 양해를 구하고, 항상 부탁을 드리고. 항상 뭐, 그런 과정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게 분명히 그분들한테 해가 되는 사업은 아닌데…… 그때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고 굉장히 진정성을 가지고 사업을 진행했지만……. 음…… 주민들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아무래도 정말 모르셨을 거예요. …… 얘들은 뭐지? 어... 그거를 ‘라포 형성’이라고 할까요 그거 할 수 있는 기간이 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공공미술을 진행함에 있어 늘 양해를 구하고 늘 부탁을 드리는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해와 용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공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감정노동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미 유명한 서울의 이화마을에서 만난 사람에게는
“공공미술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해보신 입장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공공미술을 어떻게 바라보세요?”
라고 물었는데,
그는 다들 욕하면서 다들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공공미술은 사실 말은 되게 거창한데, 음……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따지고 보면 공공미술 작업을 다 욕하면서, 다 어쨌든 공공미술을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거는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문제고, 근데 실제로 보면 그게 문제이긴하거든요.”
물론 이 이야기들은 오늘의 짧은 발표 위한 단편일 뿐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공공미술과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볼 예정입니다.

저는 공공미술이 도시정치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문제와 관계되어있고, 그 문제들은 어떻게 사람들을 연결하는지가 궁금합니다. 다시 앞서 언급된, 시민이 원하는 좋은 공공미술을 말할때, 시민은 우리이고 우리는 모두라고 말할 때, '모두'는 누구이고, '모두'안에 배제된 사람들은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좋은 공공미술을 말할 때 그것이 누구에게 좋은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제가 누구까지 만나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대통령이나 투기세력들도 만나볼 수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들과 연결된 고리에서 공공미술의 지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공공미술에 대해 로잘린 도이치(Rosalyn Deutsch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미학적 접근을 동원해도 최근 공공미술작품의 상황을 설명하지 못하며 대안적이고 변혁적인 실행에 맞는 적당한 용어도 제안하지 못한다. 심지어 공공영역의 문제들을 일부 이해했거나 미학적 지각에 대해 세련된 유물론적인 비판을 내놓아도 일반적으로 도시정치학에서 관해서는 부적절한 지식만 제공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저는 이미 어떠한 답을 찾지 못하는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한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손은 다른 손을 잡고, 다른 손은 다시 다른 손을 잡는, 끝도 시작도 없는 공공미술의 공동세계. 그러한 연결고리가 공공미술의 항해에서 구명튜브가 될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물의 기호들 : 익숙함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서는 공간에서의 대내외적인 홍보와 교육 등의 방식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유예하거나, 불식시키는 과정이 있다. 이러한 과정은 기획자 혹은 기획단체가 사회적 순기능을 위한 필요과정이라고 생각하거나, 다음 프로젝트로 이어지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수단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마치 이 불만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의존한다. 프로젝트는 공공성을 지향하는 듯 보이다가 결국 사적인 어떤 문제들만이 남기고 사라지는데 사실 이 시기에는 누구도 책임을 가져 가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 주민들에게는 변형된 공간에 익숙해지는 시기가 온다. 그리고 결국, 이 익숙함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유일한 '공공' 재산이 된다. 때로는 삶을 예술로 구성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들은 기다림과 익숙함을 배워야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공공 미술에서의 무난한 성공쯤으로 말 할 수 있다면, 노련한 기획자들은 사물들의 모든 과업에서 이 익숙함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직조하는가에 따른 전략적 접근에 기인한다. 죽은 사물 사물들의옆에 놓인 설명판을 보게되면, 상당히 많은 확률로 기이한 문장들로 쓰여진 것들을 보게 된다. 대부분 사물의 표면적 장식들에 뒤엉킨 내용을 묘사하고 있으며, 각자의 유토피아적 소망으로 마무리 짓는다. 사물들은, 대량으로 양산되고 있는 공공 미술 이미지의 찌꺼기들- 예를 들어, 벽화에 흔히 쓰이는 이미지, 짜 맞춘듯이 몇가지 안에서 정해지는 조형 재료들과, 혹은 오직 장식을 목적으로 하는 기호들- 을 한 곳에 뭉쳐 놓은 방식이다. 그래서인지 그러한 사물들은 오직 빈 곳을 채우기 위한 강박적 행위가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사물들은 기원적 태생의 배경 그 자체가 처음부터 폐기되기만을 기다리는 죽은 사물로써 태어나는것 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사물은, 살아있는 자연의 껍데기와 생명의 작동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포르노그라피 "xx형한테 많이 챙겨 줬어요." - 공공미술 참여 작가. '사물화'는 어떠한 대상이 사적 욕망을 위해서 하나의 상품이 되는 과정에 가깝다. 주체를 비판할 대타자가 없는 상태에서 작업 생산자의 이러한 발언은, 공공 미술 그 자체가 철저하게 사물화되었음을 날것으로 증명한다. 사물이 생산자의 물신적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생산자가 ‘공공'의 영역을 '사적' 욕망의 영역으로 손쉽게 환원하고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첫 번째, 사물들의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재료는 대부분 짜 맞춘 듯이 몇 개의 정도에서 정해지며, 그 크기는 한 면의 길이가 최소 2,000mm가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다. 사물의 크기가 작다면, 그 숫자를 늘려서 공간을 차지하는 형태가 되며, 평면에 가까워진다면 얇고 길어지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제작자의 사적인 이득과 사물의 부피는 반비례할 것이므로 사람이 인지하기에 크다고 느끼는 지점 즉, 보는 사람의 인체보다 좀 더 큰 것이 기준이 된듯하다. 이는 사물 생산자가 받은 자본을 최대한 외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강박적 의무와 생산자의 사적 자본의 욕망이라는 교차로에 출연한 결과이다. 또한 사물의 재료와 크기는 곧 투여된 노동력과 자본을 대표한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질서는 사물의 성격과 상관없이, 생산자가 사물의 크기와 재료를 미리 결정하게 만든다. 따라서 짐작건대, 제작에 투여되는 자본의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크기와 양은 비례해질 것이다. 거기에는 생산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어서 만약 재료적 제약이 없다시피 하여 무한히 커지거나 길어질 수 있다면, 사물은 당연히 공간이 허락하는 한 무한히 증식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사물은 불가침의 신성한 영역으로 남겨진다. 공공의 공간을 점유하는 순간, 경탄을 제외한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때로는 공공의 공간을 점유하면서 가해지는 폭력이 생기더라도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상에서 유일하게 이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는 그 위에 누군가 몰래 쓰레기를 올려놓을 때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침범 행위에서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로 변화시킬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의 본래의 용도를 바꾸는 것. 즉, 신성한 사물의 불가침 영역에 전혀 다른 용도를 덧입힘으로써 본래 사물에 힘을 가하는 것이다. 공공의 영역을 점유하는 순간, 공공 미술작품은 여전히 공공의 영역이 아닌. 오직 사적인 영역에서만 작동하는 듯 보인다. #3 사물들은 대부분 장소 특성적인 내용을 강박적으로 적용 당하고 있다. 제작자는 이러한 특성을 재고해 볼 여지가 있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이것은 모든 사물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어쩌면, 이러한 특징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은 공공을 사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사물의 장소 특성적 성격이 곧 그 장소에 종속됨을 의미한다면 그 장소에 먼지처럼 퍼져 있는 욕망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사물의 기호들 : 기능 "멀리 떨어져서 삼자의 시민으로 봤을 때는, 작품의 '의미'를 보고 좋았다고 생각했다. 뉴스로도 접하고 내용을 보면서, 상징성에서 그래 '잊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저 그림의 주인공들은 싫어할 것 같다. 본인이 맞닥뜨린 그 모습이. 예전에 고생했던 그 모습을 직면하는 게 싫지 않을까." / "흰여울문화마을도 실제로 사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러나 외부인들이 벽화를 보고 구경하는 건 좋아한다. 관광객으로 가는 것은 좋은데, 실제로 사는 사람들은 불편하고 싫어한다." - 영도 주민 (영도 부동산 중개업) "이제는 사람들이 벽화를 그린다고 하면, 우리 동네가 싸진다고 생각한다. 환경개선 대상 지구로 지정되는 것처럼... 그래서 새로 아파트를 짓는데 담이 높아서 거기에 벽화를 그린다고 하면, 주민들이 난리가 난다고 한다. 아파트 가격이 내려간다고." / "감천문화마을은 원주민이 아니면 외부인 출입 시간제한이 생겼다고 한다. 또는 원주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창출 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도 있다고 들었다." - 영도 주민 때때로 벽에 그려진 사물과 이외의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물들의 태생적 기원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을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공간을 위한 것이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목격한다. 이 사실을 부정할 만한 어떠한 사물, 즉 그 공간의 사람들을 위한 특정한 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물의 태생적 기원은 모두가 공공의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결국, 미적 장식이 유토피아가 되는 사태 속에서 사물의 효용적 기능은 처음부터 부차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특정적 기능을 가진 사물들이 태어나기 위한 프로젝트 및 사물의 생산 배경과 과정, 점유하고 있는 공간 속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를 자세히 보기만 하면 된다. 사물들은 내부의 사람들에게는 작동하지 않으며, 외부에서 삽입된 시선의 결과이다. 따라서 오직 외부로 인해서만이 사물은 작동한다. 이것은 공공미술과 젠트리피케이션이 분리 되어 생각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기록#1 A 작가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높은 금액을 요구했고, 실제로 다른 작가들에 비해 높은 금액을 지원받았다는 인식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가 스스로가 다른 작가들과 비슷한 수준의 사례비만 받겠다고 기획단체 측에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제작비는 모두 인건비와 제작 관련한 비용으로 지출했다고 했다. 제작을 맡은 업체는 B 작가가 운영하는 조형물 제작 업체이다. A 작가는 구청 및 기획단체에서 애당초 원하는 모양과 내용이 있었고, A 작가는 이를 승낙 했다. 그러나, 진행 과정에 있었던 기획단체 대표의 간섭은, 조형물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 11월 2일 A 작가 도우미와의 대화 기록. 기록#2 C 작가는, 스스로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그 프로젝트에서의 '수월함'과 '가성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줌. 조형물 형태를 만드는 다른 지역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D작가의 고생스러움과 비교. C 작가는 공공 미술이라는 유행 속에서 작가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최소화하는 반면 높은 임금을 벌 수 있는 것에 만족한 듯했다. 그 프로젝트는 임대한 전시장을 작가들이 운영하게 하면서 전시를 이어가는 방식이었고, 주민들은 작가들의 인스턴트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었다. - 9월 28일 C 작가와의 대화 기록. 기록#3 직접적으로 질문 한 것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나온 것. 주최 측이 작가에게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주는 것에 대해서, 대체로 작가들은 긍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다. E작가는 기획단체 측에서 제시하는 장소에서 작업하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하는 것이 없었다. 동일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다른 작가들 역시 비슷한 태도였다. 또한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의 외부적 간섭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혹은 F 작가는,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공공 미술에서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 11월 5일 E 작가와의 대화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 기획자 및 기획 단체들이 기본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틀을 작가한테 마련해주는 경우, 작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작품 내용 및 방향에 대하여 별다른 문제점을 제기하기보다는 일단, 받은 틀을 수용한 후 그 안에서 생각하고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식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작업 진행에 있어서 작가에게 어느 정도 소극적인 태도를 동반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제공된 가이드라인을 수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작가에게 '공공'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이 요구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공된 가이드라인은 이미 무엇을 해야 할 것을 정해놓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처음부터 생산 장치에 대한 지배력이 상실된 상태이지만,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내기 때문에 손쉽게 이를 수용한다. 그리고 생산과정에서 가해지는 잦은 외부적 간섭은 생각보다 빠르게 작가의 심리를 안정화한다. 처음에는 불안정한 요소이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작가에게 책임 회피와 면책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방어를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나의 잘못을 대신 감당해줄 수 있는 대리자가 출현하는 상황은 의외로 작가를 수동적인 형태로 매몰시킨다. 작가가 머릿속에서 자본과 생산물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물신적 위안을 얻게 되는 것처럼, 이 역시 마찬가지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공공 미술은 프로젝트 형식을 갖게 되면서 작가에게 적지 않은 심리적 방어막이 되어주기도 하는데, 아무도 이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지 않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공공'의 영역을 사적인 영역으로 인식하고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손으로 잡는 순간 빠져나가는 "공공기관에서 시키거나, 주문하거나, 흉내 내거나, 알아차릴 수 없는 것들로 작업을 진행한다. 공공 기관이 알아차릴 수 없는 애매한 부분으로 작업한다." "매개자는 양쪽의 입장을 다 만족하게 해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양쪽 입장을 다 들어주고 다 만족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일종의 '절충안'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이 이런 절충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쉽게 절충주의를 합리적으로 생각하지만 결국 이것은 이쪽도, 저쪽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모난 부위를 깎아서 평평하게 만드는 게 절충주의라면 기획자든 예술가든 가장 피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예술의 상황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 없어지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지금 전국 공공 미술 정책이나 상황을 보면 이런 평지화 작업 같다. " - P 작가와의 대화 매우 소수의 작가들은 외부에 의해 작가가 매몰되지 않기 위한 전략을 스스로 구성한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프로젝트가 예상하기 힘든 상이한 조건들의 환경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로인해 외부에서 가해지는 간섭들이 작품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요소로 인지한다. 따라서 섭외되는 단계부터 자신이 설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이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 혹은 자신이 우려하는 결과가 프로젝트에서 예측되는 경우는 제의를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경우 또한 자신의 행위 기원을 변형하지 않으며, 외부적인 간섭의 경우가 생긴다면 프로젝트를 중단하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손으로 잡는 순간 스르르 빠져나가는 작업'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기묘한 표현은 지금껏 보아왔던 다른 사물과의 차이점이 드러낸다. 작업은 물질적으로 공간을 점유하지 않거나, 점유하고 있다가도 불특정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자연적인 요인으로 인해 사라진다. 따라서 작가는 작품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위를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인해 정형적이고 확고한 형태의 사물들을 요구하는 공공기관 또는 공공 미술, 그리고 먼지 처럼 도사리고 있는 사적 욕망 시스템의 갈고리 사이를 빠져나간다. 사물의 기호들 : 재기발랄함 사물 생산자에게 찌꺼기는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찌꺼기는 생산자들이 사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용하다고 인식한 이미지와 정보들을 머릿속에 축적한 것이다. 찌꺼기가 쓰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검열과 앎의 과정을 요구하며, 그것들을 폐기해야 할 때도 있다. 때때로 생산자들은 그러한 과정 없이 손에 익은 찌꺼기들을 모아 공간을 도화지 삼아 마구잡이 식으로 콜라주 한다. 만드는 정성스러움과 수고로움, 미적 형상이 미덕이 되며, 형상만을 뇌리에 각인시키려는 자각방식을 우선으로 재기발랄함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반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생성해내는 것은 아니고, 단지 파편적으로 머릿속에 존재하는 찌꺼기들을 의미 없이 사물에 붙이는 방식을 반복한다. 그래서 어떠한 것을 '생성' 하는 것이 아니라, 유아적으로 '메우는' 행위가 목적이 된다. 그 결과 사물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유령 같은 상태를 맞이한다. 또한, 사물의 옆에 항상 존재하면서 사물의 언어를 대신하고 있는 설명 판을 보면 사물과 언어, 내용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되는데, 이역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설명 판에서 보이는 ' 이 사물의 ~은 ~을 의미한다. ', ' ~을 나타낸다.' 는 식의 문장, 또는 마법의 주문 같은 기이한 문장은 앞서말한 사물이 유령화 되었음을 드러내는 결과이다. 생산자들은 공공미술이라는 기계속에서 우리 시대를 어떻게 잘못된 방식으로 결정하고 이미지화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오른손이 얻을것을 왼손이 뺏아가도 어짜피 한몸뚱아리 인 것을. 사물들이 공간을 점유하려고 하는 순간, 모든 '공공'의 것들이 사적인 영역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미 다양하고 예측하기 힘든 사적인 욕망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공간을 사물로 채운다는 사실은 결국, 모든 사적 욕망을 채워야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다만, 1%의 사물 생산자는 애초부터 자본가의 사적 공간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자유롭다. 사물이 어떻든 그들은 자본가와의 계약에 충실한 봉사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반면, 이 외의 사물 생산자들은 사물이 점유되는 공간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그 운명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 공간적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야 하며, 사적으로 귀결되는 상인들과 주민들의 욕망을 무시할 수 없으며, 미적인 아름다움과 작가로서의 열망을 쏟아야 하며, 자신의 사적 욕망과의 적당한 타협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주최 측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도 작가로서 긍지를 잃지 않아야 한다. 생산자는 이 모든 게 조화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적 욕망이 들끓는 공간에서, 이러한 조화로움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국, 모든 것을 수용하는 방법이라고는, 겨우 무난한 변화 정도라고 귀결된다. #4 어떠한 프로젝트 경우, 상인들의 반발로 인해 프로젝트의 일부가 수용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는 상인들의 지극히 사적 욕망이 작동되어 발생한 경우이다. 상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한 공공주차장이었지만, 사물이 그 공간을 대신하게 되면서 생긴 반발이다. 결국, 사물은 주차장을 대신하게 되면서 거센 반발만 남았다. 반면, 주변의 신축 아파트 주민들은 상인들과의 대조적으로 긍정적인데 이 역시 지극히 사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또한, 시장 입구 쪽에서의 설치 중이거나, 설치되었던 사물들 일부는 철수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상인들의 이유는 불분명 하다. 단지, 반대쪽 상인들의 반발이 컸다는 점에서, 한쪽 시장의 입구가 랜드마크화된다면, 반대쪽 상인들의 경제적 이득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이유가 가장 가까운 추측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정치적으로 구성하여 현재의 정치 세력에 피해를 주고 다음 세력으로 입지를 구성하려는 정치 세력과 이를 돕는 언론이 더해진다. 이러한 개떼 같은 욕망의 삶 속에서 '공공'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희극적 변형을 겪게 된다. #5 공공기관의 경우, 또는 그 공공기관을 대표하는 누군가는 그 공간을 오직 경제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실재와 현실을 혼동하는 위치에서 그러한데, 결국은 실재로 오인된 현실적 경제적 지표와 이를 위한 미적 완화의 결과만 가지고 성과 보고 하는 게 공공기관의 속성이다. 그리고 분석과 성과는 곧 지극히 사적인 방식으로 적용된다. 만약, 성과 보고의 양식에 기록되기 힘든 형태 즉, 기록의 시스템에 적용하기 힘들거나 공공기관 체제가 수용하기 힘든 반동적 성격의 작업이라면, 공공기관 담당자 또는 대표하는 누군가는 매우 난처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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