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리서치 플레이스랩 프로젝트 영도
미워하다 좋아진 싫어하다 사랑하게 된 섬. 이것은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 옛 길 위에서 본 섬의 시간. ‘노이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존재들. 그들이 섬 밖으로 나간 것을 보지 못했다. 바다에 닿지도 않았는데 바다를 닮은 구석. 정작 남아 있는 건 없다. 한 걸음 물러난다는 마음으로. 그림자가 끊어진다. 목적지가 있다면 쉬는 것은 멈춘 것이 아닙니다. 소소하고 시시하더라도 나는 늑대이지 말아야지. 경계는 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이 살던 그곳이 더이상 그곳이 아니게 되는 것. 변하지 않아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김현주

철학, 미술이론, 영상문화학을 공부했다. 예술의 상품 가치 대신 선물과 증여 가치에 대해 고민 중이다. 정체성을 폐업 큐레이터에 두고 있으며, 일이 있을 때에만 잠깐씩 개업하고 일이 있을 때만 글을 쓴다.

이 글은 영도(影島)의 영도(Degree Zero)에 대한 글쓰기다. 『글쓰기의 영도』를 집필한 롤랑 바르트가 지녔던 완성할 수 없는 글쓰기의 무력함은 공유하면서도 특성 없음이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그 없음도 긍지가 될 수 있다는 고민에서 출발한다. 더불어 전승의 영도라는 제목을 단서로만 공유한 채 의뢰한 사진은 글의 보조 장치가 아니다. 영도에 대해 보고 듣는 전승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혹과 오인, 늦은 당도를 인력과 척력을 부리는 글과 사진으로 패치워크해 본다

전승의 영도
Degree Zero of Transmission


1. 전승의 시차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글은 전승(傳承)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이 표현에는 더께가 끼었다. “이 글은 전승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시작하지 못했다. 이유나 근거도 앞세우지 않고 무람없이 “그러니까”라고 시작하여 역시 단서도 없이 “말하자면”을 덧붙인다. 그래서 이 글은 틀려먹었다. 공동의 화제를 굳이 들자면 알다시피 영도(影島)가 프로젝션(projection) 된다. 프로젝션이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투사(投射)에 해당할 때 상으로 맺힌 영도는 희망의 형태든 절망의 형태든 바라볼 대상이다. 한편 복기해보면 뛰는 말의 그림자가 끊어져 보인다는 의미의 절영도(絶影島)가 영도의 옛말이랬다. 과연 영도에서 투사의 끊어짐이 가능할까 질문을 가져보다 결단코 끊어짐이란 없(었)다는 모순에 봉착한다. 그래서 전승에 대한 희미한 희망과 실망, 절망을 갖는다. 그러나 언젠가 희망(希望)도, 실망(失望)도, 절망(絶望)도, 망(望)에 근거하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에는 슬픔도 기쁨도 없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글은 영도를 실마리로 보고 들은 전승의 거스러미다. 더디게 그러모아 나아간 이야기다.
ⓒ 곽동경, 날숨 #1, 2021
2. 미래와 연동된 과거

내가 다섯 살 무렵 부산에 이사 온 내력을 한참 몰랐다. 잊고 있었다가 더 정확하겠다. 부산 일신기독병원에서 태어났단 기록은 어렸을 적 학교에 내는 가정조사문에서 읽었다. 그리고 인천에서 자라다가 부산에 (돌아) 왔다. 기억이 점 점으로 남아 그 반경은 협소하다. 몸이 그릴 반원 정도의 큰 점처럼만 기억이 남았다. 골목 끝 집에서 담 모퉁이도 무서워 돌지 못했던 어린 날이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다시 인천에서 부산으로의 이사는 직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머니가 상해에서 평안도로, 평안도에서 서울로, 한국전쟁 때 수원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 오던 그 길이 단순히 직선이지 않은 것과 같다. 아버지는 김포에서 나고 자라다 어린 날 부산 형님 집에 의탁하게 되었다. 대학을 서울로 갔다가 부산, 인천, 부산으로의 이주가 연이어졌다. 내게 부산에 대한 기억은 광안리 바다에서 멀지 않던 외할머니의 집과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살던 대연동의 주택으로 이어진다. 내 중심의 서사는 그렇다. 이 서사에서 힘의 작용이 영도의 대선조선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광안리, 경성대 앞, 남천동 일대에 조밀한 유년 시절을 낳은 건 영도 대선조선에서 인천조선으로, 다시 부산 선급으로 아버지의 이직이었던 거다. 바다 가까이에서만 살았던 이유는 조선업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정년을 지나 칠순 넘어서까지 조선업에 몸담으셨다. IMF에 많은 가장들이 실직하던 그 시기에도 조선업은 호황이었다. 아버지는 조선업의 수주가 10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라서 조선업의 현재는 미래와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끔 말하곤 하셨다. 촉탁 선박 검사원으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더 이상 일터에 나가시지 않은 건 미래와 연동된 과거에 점차 조선 수주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업이 한국에서만 사양 산업인가요 묻는 순진한 질문에 아버지는 세계 유통, 물류, 생산의 연쇄 고리를 상기시켜 주셨는데 덕분인지 실업과 빈곤, 쇠락의 응달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엷은 막을 고루 드리우게 되었다.
ⓒ 곽동경, 날숨 #2, 2021
3. 담 너머 현장

한국 조선업이 국가 주력 산업임은 근현대사에서 명징하다. 특히 포항제철이 1970년대 강철을 생산하면서 강선(鋼船,steel ship) 건조의 포문이 제대로 열렸다. 현재 한국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배는 30-40만 톤에 이르며 LNG 특수 선박과 같은 대형 선박 기술은 세계 일류로 손꼽힌다. 그러나 조선업은 기본적으로 인건비에 좌우된다. 한국 조선업의 세계 구가는 한국 인건비의 저렴함과 맞물려 작동해 왔다. 저가 수주를 해도 배를 만들 수 있는 나라 한국은 여전히 후발 주자 중국과 나란히 세계 조선업을 이끌고 있다. LNG 특수 선박은 중국 기술력으로는 아직 따라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도 부산, 부산에서도 영도는 국가 산업의 큰 축을 차지하는 조선업의 메카였다. 1937년 일본 자본으로 설립된 조선중공업은 남한 유일의 중공업이었고 해방 이후 대한조선공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현재 한진중공업에 이르렀다. 영도의 대선조선도 1945년도에 설립되어 영도 조선업에서 또 하나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STX의 전신인 대동조선까지 영도에는 중형 조선소와 그 외 소형 조선소가 현재까지 봉래동과 남항동 일대에 즐비하다. 그러나 조선업의 중심지로서의 영도의 위세는 1970년대 지각변동을 겪는다. 대형 조선소 세 곳인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이 울산과 거제에 자리하고 중소형 조선소가 조선업이 과열되는 기간에 접안 가능한 한국 곳곳에 설립되면서 영도의 상징성은 역사에 편입된다. 영도 내에서 건조 가능한 선박의 규모가 크지 못하고 건조보다는 수리로 명맥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부산에서도 영도 이외에 녹산 공단에 조선소가 생겼다. 영도에서 건조 가능한 선박은 한진중공업이 5-10만 톤 이하이고 그 아래로 작게는 연안에서 조업하는 어선 정도의 규모까지 이어진다. 한진중공업이나 STX 등지에는 대형 크레인이 있어서 조선소임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수십 개에 해당하는 그 밖의 봉래동과 남항동 일대 조선소를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봉래동에서 한진중공업 벽을 따라가다 우측길로 접어들면서 여기서부터가 조선소라고 일러주셨다. 조선소 안을 들어가 본 건 현대중공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당혹스러웠다. 담 너머 조선소가 있고 그 현장은 도심에서 접하는 아파트나 건물 건설 현장과 외양에서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수백 명이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공장문을 들어서는 광경을 연상했었는데 발길 닫는 곳에 조선소가 있다. 담 너머 현장이다.
ⓒ 곽동경, 날숨 #6, 2021
4. 바지선과 예인선, 그리고 계류색

부둣가에 즐비한 배를 분별없이 바라보다가 배의 상당수가 바지선(barge船)과 예인선(曳引船)임을 들었다. 각각에 대한 설명보다 예인선이 바지선을 끌고 간다는 게 쉽겠다. 예인선은 엔진 기관이 있고 바지선에는 없다. 대신 바지선은 적재에 쓰인다. 필요하기 때문에 기능이 분화되었구나 싶으면서도 부산항 연안에서 수십 년째 함께 노후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바지선 한 척의 이름은 행복 6호였다. 행복 1호부터 5호도 어디 있을까 궁금하다. 부두 맞은 편에는 보세 창고가 연이어 있다. 2020년 부산비엔날레도 보세 창고 근처 폐공장 창고를 전시장으로 꾸몄다. 간판을 내린 어느 창고 안에는 한창 목공 공사가 진행 중이다. 근처 다른 창고도 카페로 단장하여 유명해진 것으로 보면 보세 창고의 이름을 벗고 소위 힙한 새 공간으로의 채비로 보인다. 조선소, 부두, 보세 창고, 조선업에 연동된 기자재 판매 및 수리 업체 등 부산 원도심에서 영도로 넘어오는 초입 인근은 큰 묶음의 지역들로 구성된다. 지리적 섹터들은 서로 필요에 의해 메여 있었다. 조선업이란 게 휴먼 스케일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 산업의 자장 안 모든 일들도 휴먼 스케일 이상으로 자리한다. 툭 던져진 듯 길에 무심히 놓인 쇼와(昭和) 17년 6월, 즉 1942년산 닻도 아닌 듯한 철제 주물은 못해도 족히 원지름 100㎝는 넘어 보인다, 그 주위 선박 체인, 그 밖의 폐자재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다. 그 범상함이 주거지에서 흔히 보이는 주차 금지용 화분이나 타이어 같다고 할까. 걷다가 부둣가에 부산지방해양수산청이 세운 경고문을 찬찬히 읽었다. 4. 계류지에서 이선하는 선박은 타 선박이 표류되지 않도록 타 선박의 훗줄(계류색)을 재정비한 후 이선하여야 합니다. 뜻은 짐작했지만 찾아보니 훗줄, 즉 계류색(繫留索), 규범 표기로 계류삭은 일정한 곳에 붙들어 매는 데 쓰는 밧줄이다. 경고문의 안내가 이선 과정에만 해당하는 것일지 궁금하다. 부산에서 낙후된 지역, 탈(脫) 영도를 꿈꾸던 많은 이들이 떠나고 영도에는 빈집이 50%를 넘어가고 있다. 산업 생태계의 상황도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훗줄을 재정비하지 않고 이선하는, 먼저 떠나는 것이 현명하다 생각했을 수십 년이 굵직한 지역들에 균열을 냈다. 조선업이 찬란했다 하더라도 그 시절 영도에 부를 내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 균열을 메울 수 있을까. 수직으로 내려 꽂는 공공예술(plop art)은 횡축에서 작동하는 힘을 받지 못한다. 끌고 끌리며 묶고 재정비하면서도 휴먼 스케일을 넘어서는 상상력과 실행력을 감히 예술이 발휘할 수 있을까. 성공과 성과는 자본의 언어이고 낭만적이라 피하고 싶은 치유나 회복이 그나마 예술의 언어다. 잘 되면 고딕 성당의 플라잉 버틀러스(Flying Butlers)처럼 날아 오를듯 화려하지만 내외 벽을 받치기 위해 제작된 지지대 정도가 예술임을, 그래서 예술은 혼자 서지 못한다.
ⓒ 곽동경, 관찰자의 기술 #4, 2021
ⓒ 곽동경, 관찰자의 기술 #5, 2021
ⓒ 곽동경, 관찰자의 기술 #9, 2021
5. 블루라이트 요코하마, 푸른등 영도

마치코바(町工場). 남항동 일대 공장을 부르던 일본말이다. 이곳에는 상가(上架)한 배를 수리하는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페인트를 칠하기 전에 녹슨 부위나 배에 붙은 조개를 긁어내고 페인트칠을 하는 수리 조선 업체들이 자리한다. 도시재생사업 결과 이제 깡깡이 예술마을 명칭으로 단장하여 걷고 사진 찍기 좋아하는 외지인들의 관광 코스가 되었다. 깡깡이 안내센터 초입부터 정처 없이 걷기로 했다. 바닷바람에 푸드덕거리는 차 덮개를 보며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래동보다는 인간 신장에 가까운 선박 폐자재들이 거리 곳곳에 있어 현상학적 무대가 도처에 있다. 누군가 버려진 철제 원통과 같은 구조물에 글을 지울 때 쓰는 문구용 화이트로 일본어 구절을 한글로 음차하여 짧게 남겨 놓았다.

마찌노 아까리가
도데모 기레이네
요코하마.

1968년 발매된 이시다 아유미의 블루라이트 요코하마(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의 첫 소절로 “거리의 불빛이 참 아름답네요 요코하마”를 노래한다. 항구 도시 요코하마는 한국으로 치면 인천에 가까운데 바다에 비쳐 흔들리는 불빛의 밤은 부산도 요코하마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나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를 거론할 때 그 도시들의 낮은 대조적으로 요란하지 않던 경험이 있다. 과정에서는 암묵적으로 서로 무엇을 보고 담는지 밝히지 않기로 한 사진 작가가 보내온 남항동 일대의 낮은 푸른 빛이 조금씩 날아가 있다. 청감성(Blue Sensitive)이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사진들은 사진 감광 재료가 파장이 짧은 파랑에 민감한 감색성을 가지고 있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능한 대상을 무르고 색에 집중한 사진들에서 넝마꾼이 되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움을 찾는다.

한참을 걷다가 벽에 적힌 주의를 읽었다.

도장 작업 중
주차 시 커버 하세요.

낮밤의 콘트라스트 아닌 이유와 사연이 여기 저기에 있다.
ⓒ 곽동경, Blue sensitive #1,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2,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3,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4,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5,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6,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7,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8,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9,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10,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11, 2021
ⓒ 곽동경, Blue sensitive #12, 2021
6. 특성 없는 영도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는 중고 자동차 매매 시장이 크게 자리한다. 그래서 근방에는 자동차 정비 공업소와 부품 업체 상가가 자리한다. 다급한 상황이 아니고선 이 부근의 생태에 대해 일상에서 알 일이 없다. 조선소와 수리 조선소가 자리한 영도에는 선박 자재 및 수리 부품 업체가 섬 전체 산업 생태계의 다수를 차지한다. 딱히 이해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눈에 들어올 일이 없다. 새롭게 생겨나는 카페, 복합문화공간, 문화거리, 산책로, 명소인 태종대 등지가 도드라지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근접해서 보면 약국에 선박납품전문, 동물의약품을 취급한다는 간판과 페인트 스토어라는 상호 아래 대리점 마린상사가 덧붙는다. 무수한 도시의 외양에 조선 산업의 레이어가 한 층 더 입혀졌다. 이 상태가 영도에서는 숨 쉬듯 자연스럽다. 누군가는 밤이면 내리는 을지로 업체들의 셔터문을 기록한다. 또 누군가는 철거지역의 문과 창을 기록한다. 의욕하는 기록이 서글픈 건 남기면 남길수록 이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사실 그 선후는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 사라져가기 때문에 더 다급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한국 역사 연구 프로젝트(Korean History Rearch Project)를 2012년부터 진행 중인 디자이너스 파티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라오는 사진을 볼 때 종종 사진을 찍었을 무렵과 현재의 관점이 극적으로 상이해 짐을 느낀다. 인물에 맞춘 초점에서 배경의 아파트 발코니에 놓인 장독대에 눈길이 가고 저 너머 펼쳐 든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에서 시대 쟁점을 간취한다. 영도에 대한 연구와 기록은 정책과 행정의 지향점을 향해 수렴시키는 방향 대신 무사심하게 내 놓는 믹스커피 젓는 숟가락이나 이제는 보기 드문 벽지, 몸으로 기억하는 산복도로마다의 각도와 기울기에 대한 구술, 건축 환경 변화에 따른 시대별 가정집 하루 빛 들어오는 모앙새 추적 등 시시콜콜하다 여겨서 우선 순위에서 밀려 툭 베어져 버린 그냥 그런 것들에 닿았으면 한다. 목적 있는 삶은 아주 오래 영도에 밀착했다. “학자의 연구실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 같은 논문과 논설들”이라고 자신의 소설을 자평했던 로베르토 무질(Robert Musil)처럼 특성 없는(without Qualities) 영도로도 괜찮을 때, 일 아닌 일상이 시작하지 않을까.
7. 거품도 맥주라는 말을 믿을 수 있나

큰아버지는 부산 MBC 기술국장으로 정년하셨다. 부산 기업 현황을 모르던 어린 날 부산 KBS, 부산 MBC 이런 알만한 이름들은 크게만 느껴졌다. 그 큰 이름과 큰아버지의 결합은 더욱 크게 느껴지던 시절이다. 그런 큰아버지의 젊은 날은 1949년 부산의 첫 백화점으로 문을 열어 광복동 상권을 대표하며 1990년대 후반까지 부산에서 가장 비싼 땅으로 평가됐던 미화당백화점의 라디오방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 라디오를 팔고 수리하는 라디오방과 방송국 기술국의 격차가 하늘과 땅처럼 느껴지는 건 지금 일이고 1959년 문화방송(現 부산 MBC)이 국내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국이었다는 자료를 접하니 라디오방과 라디오 방송국의 격차가 확 좁혀졌다. 근대 산업화는 한국의 동맥이라 불리는 경부고속도로처럼 굵직한 선으로 그어지는 게 아니라 이처럼 폐 주름처럼 촘촘한 접힘과 펼침으로도 드러나는구나 싶다. 선박 검사는 선체, 기관, 전기 세 파트로 이루어진다. 선박 전기 검사를 맡으셨던 아버지는 전기공학과를 나오셨다. 지금이야 전기전자전파공학부와 같이 학과통합이 빈번하지만 대학 진학하던 시기를 회상하시면서 전기과에 가면 맥주를 먹고 전자과에 가면 막걸리 먹는다는 말에 전기과를 가셨다고 덧붙이셨다. 지금 시대 맥주는 청량감으로 대표되지만 그 시대 맥주가 안락함을 상징했구나 싶은 마음에 산업근대화 시대 청년이 꾸던 맥주의 의미를 곱씹는다. 아버지는 이른 나이 과음으로 위궤양을 앓으셨고 그래서 더는 술을 잘 드시지 못한다. 맥주로 위궤양까지 가겠나 싶은 생각에 전기과 졸업 후 맥주 먹는 삶을 꿈꾸던 희망이 그다지 현실적이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신입사원으로 대선조선에 입사하여 당시 월급 15만원을 받던 아버지는 두 배 월급을 제안하던 신생 조선소 인천조선으로 가셨다. 아버지는 인천으로 향하셨지만 한진중공업 전신이자 조선중공업, 대한조선공사로 이어진 한국 최대조선소가 자리한 부산 영도가 오랜 기간 한국 조선업의 메카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조선공사는 한국에서 최고 기술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었고 현대중공업이 1970년대 설립되면서 이 기술자들이 현대중공업으로 대거 이직하게 된다. 맥주를 먹는 삶을 꿈꾸는 이들이 영도에서 선박이 접안 가능한 다른 곳을 향해가며 영도의 조선업 거품도 잦아들었다.
ⓒ 곽동경, 관찰자의 기술 #3, 2021
ⓒ 곽동경, 관찰자의 기술 #6, 2021
ⓒ 곽동경, 관찰자의 기술 #7, 2021
8.
ⓒ 곽동경, untitled, 2021
조선업 지대를 영도의 북동쪽과 북서쪽을 나누어 살펴보다가 남항동 일대를 벗어날 무렵 영도까지 전차가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던보이 모던걸 시대 풍경으로만 느껴질 소식이 생각보다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시골 소년이었던 아버지는 그 시절 몇 안되게 무시험 전형이던 영도 부산남중에 입학하였다고 하셨다. 대청동에서부터 남중까지 전차로 통학하던 시절을 회상하시며 전차 종점이 이 부근 어디였음을 기억하셨다. 찾아보니 전차는 1935년부터 1967년까지 운행되었다고 한다. 노선은 서면, 구덕운동장을 거쳐 영도 남항사거리를 종점으로 했다. 다시 찾아간 남항사거리에는 영도전차종점기념비가 사거리 한 모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기념이란 것이 참 묘해서 존재하는 시기에도 위세를 떨치던 이들, 사물들의 기념비는 찾아보기도 전에 이미 회자되지만 어떤 기념은 기념비로 남아서 실낱같은 풍문으로 떠돌기도 한다. 없어진 전차터를 찾아갔으니 무언가가 없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왜 이 없음에 관심이 갈까. 전차터에 대한 추억을 들으며 부산항대교에 접어들었다. 영도에서 감만동 방향으로의 진입로는 400m 높이에서 원형으로 회전하는데 공포감으로 악명 높기도 하다. SF적 감성이 물씬 나는 미래 도시로의 진입이 끝없이 전개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영도에 남겨둔 것만 같은 ‘없는’ 것에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9. 김진숙, 박창수, 없는, 한진중공업

긴 담벼락을 따라 걷다 왼쪽 윗단이 터져 내린 플래카드를 만났다. 플래카드는 ㄱ자의 첫 획을 가렸다. 플래카드 아래 담벼락에 분필로 쓴 글자들이 눈에 밟혔다. 차라리 낙서라면 좋았을지 모르겠다 생각 드는 여섯 글자 중 ‘없는’ 앞을 유독 맴돌았다. 영도 마지막 기점에서 눈에 담고 귀로 들은 많은 것들 중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대학 신입생 봄 한참 위 선배가 바쁘냐고 물었다. 바쁘려고 대학 들어온 게 아니라서 안바쁘다고 했더니 그 주부터 한 달에 한 번 일이 생겼다. 서초동 법원 공판에 가는 일이었는데 법원도, 재판장도, 판사도, 변호사도, 모든 게 처음이었다. TV에서 봤으니 처음은 아닐 텐데 TV와는 달라서 처음이었다. 지금 와서 찾아보니 그 공판은 1994년 6월에 시작해서 햇수로 4년을 이어오고 있었다. 앉아 있다가 공판이 끝나면 밥을 얻어먹는 일이 전부였다. 밥을 먹었다고 했지만 술을 마셨다는 게 더 정확하다. 소송 원고 측 어머니는 더는 밥을 삼키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기억 속 어머니가 드시던 건 방울토마토와 굽지 않은 마른오징어, 그리고 소주 정도가 전부였다. 어떤 날엔 서초동에서의 자리로 끝나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가 사시는 성남까지 가는 날도 있었다. 늦가을까지 진행된 공판은 끝내 오지 않은 증인으로 인해 허망하게 마무리됐다. 출석하지 않은 증인은 간호사라고 들었다. 새내기여서 나를 새내기라고 부르시던 어머님은 대학을 졸업한 후 찾아뵌 자리에서도 나를 새내기라 부르셨다. 애써 차려주신 밥상이 귀해서 그날은 못먹는 콩국수를 두 그릇 먹었다.

2021년 2월 6일자 경향신문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진숙 복직 촉구 400㎞ 도보행진을 이슈로 한진중공업 노동자 박창수 열사의 부모님을 인터뷰했다. 처음 기사에 접속했을 때 사진은 미처 로딩되지 않아서 글과 캡션만이 떴다. 빈 사진 자리 아래 ‘박창수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어머니 김정자씨와 아버지 황지익씨가 2월 2일 경기도 성남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고 실렸다. 새로 고침으로 불러 들이니 그제서야 기사가 온전히 떴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참 오랜만에 사진으로 접했다. 1997년 그때 나는 한진중공업에 대해 잘 몰랐다. 박창수 열사 공판에 다녔지만 사측이 한진중공업인지 한라중공업인지 대우중공업인지 헷갈렸고 대신 경찰이 안양병원 영안실 벽을 깨고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탈취한 참혹한 사진 한 장과 식사 자리에서 반복해서 듣던 열사의 시신 상태에 대해서는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인터뷰에서 “한진이 진숙이 복직은 해줘야 돼. 그게 우리 창수 염원이고 창수도, 주익이도 다 같이 복직되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셨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담의 초입에는 기념명패가 하나 있다. 동양 최대의 세라믹 부조벽화에 대한 기본 정보와 함께 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역동감 있는 부산 해양문화와 천혜의 광관 도시 영도와 한진중공업의 친근한 기업문화를 조화롭게 상징 조형화 시켜 새로운 지역의 문화공간을 창출하였다.’ 한진중공업은 동양 최대 부조 벽화를 자랑한다. 그러나 있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없는 것이 긍지가 되는 세상. 그러니까 더 이상 김진숙, 박창수, 없는, 한진중공업이 바로 분필로 적힌 해고 없는 세상이다.
ⓒ 곽동경, 관찰자의 기술 #10, 2021
10. 영도의 영도

라퐁텐 우화에 등장하는 늑대는 시냇가에서 만난 어린 양을 먹어치운다. 냇가 스무 발자국 아래에서 물을 마시는 양에게 스무 발자국 위의 물을 더럽혔다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예전에 그랬다고, 네가 아니면 네 종족, 네 양치기, 네 양몰이 개가 그랬다고 그래서 너를 잡아먹겠다고 양을 처분한다. 늑대는 강한 자의 유비다. 강한 자의 시간, 강한 자의 사회, 그의 논리가 덮치는 시냇가에서 양의 호소는 오갈 곳 없다. 확증이 강해 법이 되면 사각의 지대는 부정된다. 영도(影島)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접근하면 흔한 관광 몇 경을 추려낼 수도, 특산품 몇 선을 선별할 수도 있다. 한국에 존재하는 3,348개의 섬들 마다의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영도가 그 우위에 있는 것들을 추려내면 근사할지 모른다. 가능태가 아니라 그 목록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변별의 관점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니체의 관점주의(perspectivism)는 다수의 진리가 있을 뿐임을, 그래서 신념, 욕망, 의지가 관점에 연동됨을 인정하게끔 요청한다. 상대주의의 수긍 아닌, 이 섬의 신념, 욕망, 의지가 작동하는 기저를 직시할 때 이 섬의 고유함이 오롯해진다. 섣부르게 형용사를 얻지 않도록 또 섣부른 글쓰기가 되지 않도록 내게 영도(影島)는 처음부터 영도(Degree Zero)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다. 특히 그 전승에서 발생하는 미혹과 오인, 늦은 당도를 기어이 인정해야만 한다. 소소하고 시시하더라도 나는 늑대이지 말아야지 그리고 포장이 과하지 않아야지 다짐했다.
ⓒ 곽동경, 날숨 #7, 2021
글: 김현주
사진: 곽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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